목욕탕

시골 목욕탕 부활 현장을 생생히 담은 기록

jaeney 2025. 6. 29. 10:24

목욕탕

 

 

 

‘다시 문을 여는 날’에 도착한 작은 마을

2024년 가을, 전북 남원의 한 작은 마을. SNS에서 “시골 목욕탕이 다시 열린다”는 게시글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오래된 공중목욕탕을 리모델링해 마을 공동 공간으로 바꿨다는 얘기는 몇 번 들었지만,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직접 그 공간이 숨을 다시 쉬는 장면을 보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시골 마을로 들어서자, 초입에 ‘동림탕 재개장’이라는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외벽과 창틀은 그대로였지만, 목욕탕 입구 유리문에는 새롭게 붙인 안내문이 보였다. “매주 수·금·일. 오전 9시~오후 5시. 족욕은 누구나 무료. 커피는 자율 기부.” 그런 안내가 뭔가 정겹고 낯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이 살짝 맺힌 유리문 너머로 온기가 느껴졌다. 시골 목욕탕이 진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타일 아래로 흐르던 시간의 흔적

 

목욕탕 내부는 현대적인 느낌보다는 ‘시간이 덧입혀진 정돈됨’이었다. 욕조는 온탕 하나만 남겨두었고, 주변에는 편백나무 벤치와 족욕 공간이 설치돼 있었다. 벽면의 타일은 일부러 전부 바꾸지 않았고, 오래된 손잡이나 때수건 고리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시간을 덧칠하기보다, 시간을 존중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안쪽 벽에는 “이곳은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지역 주민의 건강을 책임졌습니다. 지금은 모두의 기억과 이야기가 모이는 마을 쉼터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천천히 공간을 둘러보는 동안, 이 목욕탕이 단지 ‘씻는 곳’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앉아 있던 자리, 아이들이 놀던 탕 가장자리, 허리를 구부리며 머리를 감던 세면대, 모든 곳에 이야기가 스며 있었다.

 

관리자 역할을 맡은 청년은 말한다. “사람들이 예전 기억을 그대로 안고 들어오길 바랐어요. 바꾸는 게 아니라 덧붙이는 느낌으로 작업했죠.” 이 공간은 누군가의 추억 위에 새로운 추억이 덧씌워지는 공감의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다시 모인 사람들, 물보다 더 따뜻한 말들

 

오전 10시가 조금 넘자, 어르신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마을 주민이었고, 몇 명은 외지에서 방문한 여행자였다. 목욕보다는 족욕과 이야기 나눔, 그리고 마을 전시 구경이 목적인 이들이었다. 내부에는 작은 스피커에서 트로트가 조용히 흘러나왔고, 커피포트에선 보리차가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한 어르신이 벤치에 앉으며 한 말이었다. “여기, 진짜 오랜만에 와보네. 여긴 진짜 내가 젊었을 때 다니던 곳이야. 여기서 우리 막내 손 씻기던 것도 생각나네.” 그 말에 주변 어르신들이 “어어, 나도 그랬지~” 하며 공감했다. 탕 속엔 물이 없었지만, 그들의 기억은 물보다 더 뜨거웠다.

 

그날은 마을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전도 열리고 있었다. “목욕탕 속 우리 가족”이라는 주제 아래, 아이들이 그린 목욕탕 풍경은 정겹고 귀여웠다. 벽에 붙은 그림 아래엔 작은 쪽지들이 달려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랑 같이 목욕탕 가던 날이 제일 따뜻했어요.”
나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왜 이 공간이 다시 열려야 했는지를 이해했다.

 

공간은 복원됐고, 관계는 되살아났다

 

그날 오후, 시골 목욕탕 한 켠에서는 작은 주민 회의가 열렸다. 다음 달 열릴 ‘마을 겨울축제’와 관련해 탕 안을 어떻게 꾸밀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회의에는 70대 어르신도, 30대 귀촌 부부도,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도 함께 앉아 있었다. 누구도 더 높거나 낮지 않았다. 시골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평등과 교류의 장이었다.

 

관리자는 말한다. “여긴 이제 우리 마을의 공식 ‘이야기 장소’예요. 회의도 여기서, 고민 상담도 여기서, 애들 생일 파티도 여기서 해요. 처음엔 ‘탕을 다시 데운다’는 게 목표였는데, 지금은 ‘사람 마음을 덥힌다’는 게 진짜 의미인 것 같아요.”

나는 시골 목욕탕을 다시 여는 것이 단지 옛것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도시의 공공기관보다도 훨씬 인간적인 이 작은 공간이, 마을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하고 있었다.

 

목욕탕 바깥으로 나올 때, 문 앞에는 “오늘도 당신 덕분에 물이 더 따뜻했습니다”라는 손글씨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단순히 미소 짓고 넘길 수 없었다. 그것은 방문객에게 보내는 감사의 표현인 동시에, 공간을 함께 지켜나가자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