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다녀온 시골 목욕탕, 그 따뜻한 물의 기억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춘 그곳
며칠 전, 무작정 떠난 전남 구례 여행길에서 우연히 마주한 한 간판. “용산목욕탕”. 노랗게 바랜 철제 간판과 오래된 시멘트 외벽, 그리고 벽돌 아래 깔린 묵직한 타일. 자동차를 멈추고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릴 적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다니던 동네 목욕탕이 떠올랐다.
도시의 바쁜 리듬에서 벗어나고 싶던 내게, 시골 목욕탕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여행자라기보다 돌아온 사람의 마음이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밀었다. 오래된 방울 소리가 나면서 안으로 들어서자, 특유의 물기 섞인 공기와 따뜻한 습도가 몸을 감쌌다. 마치 오랜 친구가 반겨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골 목욕탕이 가진 힘은 그 순간 발휘됐다. 낯선 공간인데, 너무도 익숙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낸 풍경
목욕탕 입구엔 작은 데스크와 손 글씨로 쓴 가격표가 있었다. 어르신 2,000원, 일반 3,000원. 사장님은 60대 중반의 아주머니였고, 방금 전 보일러 온도를 체크하러 다녀오신 듯 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어르신들 많이 오시냐”는 질문에, “수요일하고 토요일은 거의 동창회 수준이에요” 하며 웃으셨다. 나는 타월과 때밀이 수건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기 옆에 앉아 머리를 감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물은 단순히 온도가 아니라 분위기로 따뜻했다. 어르신 몇 분이 탕 안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날씨, 동네 약국 이야기, 손주의 취업 근황 같은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물에 몸을 담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아무런 말도 안 했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편안함이 있었다. 시골 목욕탕의 분위기는 참 묘하다. 낯선 이들끼리도 어색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어울리는 풍경이 완성된다. 그건 설계된 인테리어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온도다.
따뜻한 물보다 더 오래 남는 온기
탕 안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 어르신이 “처음 오셨나 봐요”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확 풀렸다.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 하는지, 오늘은 몇 번째 목욕인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대화는 짧았지만 묘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르신의 눈빛엔 어떤 따뜻함과 여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 따뜻함이 목욕탕 물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탕에서 나와 탈의실로 들어가면, 벽에는 누렇게 바랜 동네 전단지들이 붙어 있었다. 고물상, 동네 미용실, 어르신 강좌 안내, 그리고 ‘이달의 생일자 축하’라는 글귀까지. 그 모든 것이 이곳이 그저 목욕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삶이 축적된 장소임을 보여줬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는데, 뭔가 내 얼굴도 달라 보였다. 단순히 개운해진 게 아니라, 마음 한 구석의 얼룩이 씻겨 내려간 느낌이었다. 이 작은 공간 안에서 흘러간 시간과 사람의 말, 눈빛, 물의 온도가 조용히 나를 감싸줬다.
떠날 땐 발걸음이 아쉽고, 마음은 따뜻했다
목욕탕을 나서기 전, 카운터 옆에 있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았다. 손에 쥐자마자 따뜻함이 퍼졌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사장님이 “여기 언제 또 내려오실지 모르지만, 그땐 수요일에 오세요. 손님들 다 계실 거예요” 하며 웃으셨다. 나는 그 말이 그냥 인사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초대처럼 느껴졌다.
밖으로 나서자, 햇빛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다. 차에 타기 전, 다시 한 번 목욕탕 간판을 바라봤다. ‘용산목욕탕’ 네 글자가 괜히 더 크게 보였다. 이 작은 시골 목욕탕이 나에게 준 건 목욕 이상의 경험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말 한마디, 공기 속 온도, 함께 있던 시간의 감각이었다.
시골 목욕탕은 거창한 문화공간도,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도시 어디에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진짜 따뜻함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내 일상에서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한 공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시골 목욕탕은 그렇게,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기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