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목욕탕 운영자 인터뷰: 다시 문을 연 이유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까운 공간이었어요”
전라남도 곡성군의 한 작은 마을. 15년간 문이 닫혀 있던 ‘미락탕’이라는 시골 목욕탕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간판은 빛이 바랬고, 내부는 곰팡이와 먼지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매주 3일간 문을 열어 어르신과 귀촌인, 관광객이 함께 찾는 공간이 되었다. 이 목욕탕을 다시 살린 사람은 바로 66세의 김영임 씨. 그녀는 곡성에서 나고 자라, 젊은 시절 서울에 살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잊은 목욕탕을 다시 살리기로 결심했다.
“이 건물이 폐허처럼 방치돼 있었어요. 마을 어르신들이 저한테 농담처럼 ‘여기서 물이라도 한 번 받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죠.” 김 씨는 처음에는 단순히 목욕시설을 복구할 생각이었지만, 점점 욕조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들이 다시 모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걸 느꼈다고 했다. 시골 목욕탕을 다시 열겠다는 결심은 결국, 공간이 아닌 사람을 위한 선택이었다.
“비용도 힘들었지만, 마을 사람들 반응이 더 걱정됐죠”
김영임 씨는 리모델링을 준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먼저 부딪힌 건 예산 문제였다. “보일러가 완전히 망가졌고, 배관도 녹슬었더라고요. 처음 견적 받았을 땐 숨이 턱 막혔어요. 최소 3천만 원 이상이 필요했죠.” 하지만 김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곡성군청에서 진행하는 ‘유휴시설 활용 주민제안 공모사업’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2,0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냈다. 나머지 비용은 적금과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충당했다.
“사실 돈보다 더 걱정된 건 ‘왜 굳이 그걸 하냐’는 시선이었어요. 마을 분들이 ‘지금 시대에 무슨 목욕탕이냐’, ‘누가 쓰겠냐’는 말을 하셨죠. 그런데 공사 막바지쯤, 매일 문 앞에 오셔서 ‘언제 문 여냐’고 묻는 분들이 하나둘 생기더라고요. 그때 확신이 들었어요. 이 공간을 정말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는 걸.” 김 씨는 오히려 그런 반응 덕분에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목욕탕은 핑계일 뿐, 사람 만나고 싶은 거죠”
현재 미락탕은 일주일에 월, 수, 금 세 차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영된다. 단순히 씻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목욕보다는 ‘이야기’를 하러 온다. 김영임 씨는 말한다. “여기선 누구도 혼자 씻지 않아요. 탕 안에서 서로 안부 묻고, 정치 얘기하고, 어젯밤 TV 드라마 얘기도 하죠. 사람들 사이에 다시 ‘말’이 생긴다는 것, 그게 이 공간의 진짜 의미라고 생각해요.”
미락탕은 단순한 목욕탕이 아니라 마을의 소통 공간이 되었다. 김 씨는 탈의실 옆 작은 공간을 개조해 무료 족욕실과 책 한 권 비치된 소형 휴게 공간을 만들었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목욕 후 차 한잔 모임’을 열어 주민들이 간식과 차를 나누며 수다를 떨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어색해했지만, 지금은 저보다 먼저 와서 탕을 데워요. 목욕은 핑계고, 사람 만나고 싶은 거죠.”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 목욕탕을 열고 싶어요”
김영임 씨는 이제 ‘미락탕 지기’로 불린다. 외부에서 온 귀촌인들도 그녀의 목욕탕을 방문하고, SNS에는 ‘촌스러운데 정겹다’는 글이 올라온다. 주말에는 소규모 도보여행객이나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김 씨는 자신이 이 공간을 다시 살린 것 같지만, 사실은 목욕탕이 자신을 다시 살린 것이라고 말한다.
“고향에 와서 마음이 허했어요. 친구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런데 이 목욕탕을 고치면서 내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죠.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누가 찾아와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내 손으로 사람들 얼굴을 웃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어요.” 김 씨는 여전히 하루 두세 번씩 직접 온탕 온도를 체크하고, 비누통을 정리하며 목욕탕의 주인 아닌 ‘마을의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다.
“내가 다시 태어나도 또 목욕탕을 하고 싶어요. 그만큼 이 공간은 나한테 일이 아니라 인생이었어요.” 김 씨의 이 한마디가, 시골 목욕탕이 단지 낡은 공간이 아닌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공간임을 가장 잘 말해준다. 오늘도 누군가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따뜻한 물보다 더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